1년만의 소아과 실습 II
부제: 발목잡힌 김선생
겨우 한 주짜리 실습인데 아침마다 지각하고, 정말 멋있는 소아과 교수님들의 명강의에 비해 공부는 너무 안했다. 교수님 뵐 때마다 공부에 대한 자극을 받지만 돌아서면 느슨해지는 것은 봄이기 때문일까. 지켜보던 1년차 선생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한 소리를 하신다. 지각하지 말라고.
그 후 교수님 아침 회진 전에 도착은 했지만 이상하게 우리가 일찍 오면 교수님이 늦으신다. 첫 이틀은 8시 이전에 오시던 교수님께서 이후에는 늘 5분여씩 늦으시는게 아닌가. 머피의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난다.
더이상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눈엣가시였는지 EP study 후 교수님께서 일과를 마쳐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의쌤은 굳이 뒤쫓아나와 런천미팅에 갈 것을 요구했다. 가봐야 4학년은 앉을 자리도 없을텐데.. 그래도 어쪄랴, 학생에겐 교수님보다도 무서운게 전공의.
점심도 못 먹은채로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시작했을 시간이라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데..
‘어라! 웬 텔레비전?’
WBC 한국과 일본의 경기 관람중이 아닌가. 교수님, 전공의, 학생 모두들 모여앉아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물론 텔레비전 한 쪽 옆에는 런천미팅용 슬라이드가 덩그러니 떠 있고, 발표를 맡으신 교수님은 준비해놓고 발표 못하는 아쉬움과 야구보는 즐거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매 이닝이 바뀌는 빈 시간에 강의를 해도 9회까지 하면 다 할 수 있겠다는 모 교수님의 장난섞인 제안에 발표를 밭은 교수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신다. 학생이 볼 때는 장난이 분명한데 교수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면 스승이자 높은 선배이다 보니 교수님도 교수님이 어렵긴 마찬가지인가 보다.
야구는 중반을 향해 가는데 점심을 거른 배에서는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나서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그래, 가나?” 하는 한 교수님의 큰 목소리에 모든 교수님들께서 뒤를 돌아보셨다. 그때 눈이 딱 마주친 어느 교수님.
“어, 김선생 아니가. 김선생 지금 4학년이가? 김선생은 소아과 한다고 했지.”
내 마음이 요즘 정신과로 기우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신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으셨는지 아예 쐐기를 받으신다.
“교수님들, 이 학생이 소아과 할 거랍니다. 작년부터 소아과 하겠다고 하는 훌륭한 학생입니다.”
세상에나.. 그렇잖아도 동기들 사이에서 소아과 지원자로 소문이 나 있는데 교수님들 다 계신 자리에서 이렇게 도장을 찍으시면 난 어떡하라고. 훌륭한 학생이면 학점이라도 잘 주실 것이지, 작년 실습과목 가운데 제일 나쁜 점수가 바로 소아과다. 뭐, 공부를 대충 하기는 했지만..
말이 씨가 된다는데 나 이러다가 다른데는 지원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한번은 그런 꿈을 꾼 적도 있다. 레지던트 지원을 하려는데 소아과 지원 아니냐면서 다들 나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근데 정작 소아과에서는 성적 나쁘다며 나를 가차없이 떨여뜨린 것이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얘기라서 걱정이 되는게 사실.
근데 정말 어떤 전공이 좋을지 모르겠다. 너무 공부를 안해서 아는게 없어서 그럴까. 올 한해 밀린 공부 열심히 하면서 진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