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자리에서 환자를 보던 그 날

24 March 2009 3 Comments Category: 의학적 수다


올해부터 국가고시에 CPX/OSCE가 추가되면서 4학년 생활이 조금 더 분주하게 바뀌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걱정은 안되는데 학교에서 신경써주는 것을 보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닌가보다. 학생들 스스로 매주 하루씩 시간을 정해서 실전같은 연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처음이라 서툰 점도 많고, 연습에 임하는 우리 마음도 느긋한게 문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도 네개의 케이스에 대해서 연습을 하고 돌아왔다. 학생들끼리 하는 거지만 막상 이것저것 물으면서 ‘병원놀이’를 하다보니 진짜 내가 의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근데 이런 착각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 순환기 내과 실습 중에 파견을 갔던 어느 일차병원에서는 진짜 제대로된 ‘병원놀이’를 했었다.

그때 환자 진료하는 모습을 한 시간 정도 참관했을 무렵, 원장님께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씀하셨다. 

“내 자리에 앉고, 다음 환자는 자네가 보고 impression까지 작성해서 부르게.”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상황인가. 대학병원에서 병력청취하는 거야 환자분도 우리가 학생인거 대충 아시고, 행여 선생님으로 오해하신다고 해도 진료는 교수님이 하실 것 정도는 아실테지만, 동네 병원 원장실에서 원장님 자리에 앉아서 환자분께 어떻게 오셨냐며 이것저것 물으면 다들 내가 원장님인 줄 알 것 아닌가. 

어쨌거나 나의 첫 환자는 참 인상적이었다. 할머니신데 들어오시는 걸음부터가 아장아장한 것이 눈에 제일 먼저 띄었다. 근데 병원에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혀 때문이란다. 한의원에서 머리에 침을 맞았는데 그 날 이후로 혀가 부어서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혀를 보니 정말 부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하는게 어눌한 이유가 혀가 부어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혀가 부은게 맞는지 아닌지 확신이 안섰다. 

침을 왜 맞았는지는 여쭤봐도 그건 말 할 수 없다고 하시고, 딱히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혀랑 비교해보니 분명 그 분의 혀가 두꺼운 것 같기는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혀가 부어서 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교과서만 배운 나로서는 책에 없는 진단명을 쓸 요령이 없으니 도대체 이걸 뭐라고 써야할지 막막했다. 

근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 한가지. 할머니의 걸음걸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첫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시고, 걸음을 시작하면 아장아장 걷고 자꾸 앞으로 넘어질 듯 속도가 붙는 것이다. 

‘저건 파킨슨병 같은데..’ 

할머니께 언제부터 아장아장 걷게 되셨냐고 여쭤보니 얼마되지 않았다 하신다. 분명 파킨슨병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인데 말이 어눌해지는 것이 파킨슨병 때문인지 정말 혀가 부어서 그런 것인지 감별을 할 수 없었다. 정말 혀가 부은 것이면 어쩌지. 머리에 침 맞아서 혀가 부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침 맞고나서 혀가 부어서 침도 못 삼키고 말도 잘 안된다고 하시니 그 말을 완전 무시할 수도 없고.. 

결국 내가 적은 impression은 r/o Swollen tongue, r/o Parkinson’s disease 였다. 부은 혀라니! 쓰면서도 얼마나 부끄럽던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 원장님을 불렀다. 파킨슨병이 의심된다고 하신다. 침 맞고 혀 부은거에 대해서는 더 묻지도 않으신다. 아, 나는 거기에 대해서만 5분 넘게 꼬치꼬치 캐물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파킨슨병을 1번으로 쓸 걸 그랬네라는 후회가 막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이자, 처음으로 의사 기분을 맛보았던 소중한 경험이다. 그 날 많지는 않지만 몇몇 환자를 직접 보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학생이라면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텐데 가짜 의사지만 의사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그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책임감 있는 자리라는 뜻이 아닐까. 자신감을 얻는 것과 함께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하는 이유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다음에 의사놀이가 아니라 정말 의사생활을 하게 될 때에 그 원장님을 찾아뵙고 싶다. 예전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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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spon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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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해내셧네요… ^^파킨스씨병 뭐 시험 보는거 같아요. ^^

    솔이아빠 25 March 2009 at 8:20 am Permalink
    • 지금도 어리바리지만 그때는 더 심했답니다, 하하.

      LUV™ 27 March 2009 at 9:53 am Permalink
  2. sms보내는 처자입니다.
    아홍 낼부터 파견가요 저도 impression 맞추고 싶네요

    아홍 4 May 2009 at 1:50 am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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