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 어시스트를 서고 난 후
첫 어시스트 – 2009. 4. 8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학교에 입학하던 시절을 생각해본다. 그때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가장 많은 질문은 해부에 대한 것이었다.정말 사체 해부를 하는지, 해부를 하는 것이 무섭지는 않는지, 혹은 해부를 하다가 기절하는 친구가 있지는 않은지 등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비록 죽은 육신이지만 거기에 칼을 대고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고 때로는 충격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해부를 무서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학생들은 어떨까. 오래전 기억을 되돌려 보면 우리 대부분은 사체를 사람보다는 공부의 대상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고인이나 고인 가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해부실습실 안의 고약한 포르말린 냄새에 금새 묻혀졌다. 고인의 몸에 댄 칼이 난도질로 이어져도 해부학실습이라는 미명 하에 용서가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죽음의 의미나 의미있는 죽음보다 인체구조물 한 가지라도 더 관찰하는게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공부가 우선순위이던 그당시, 부검은 신선한 장기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인식 되었다. 그래서 비록 공식적인 스케줄은 아니지만, 해부학실습을 하는 동안 잠시 시간을 내서 부검과정을 참관하곤 했다. 해부학 실습대 위에 누워있는 실습용 사체와 달리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날것 같이 온전한 사체가 해부대에 뉘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때 ‘우리도 이런 신선한 사체로 하면 좋을텐데..’ 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다가, 교수님의 메스가 환자의 가슴과 배를 가르는 순간 그제서야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며 머리를 몽둥이에 맞은 냥 어질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학년 선택실습으로 법의학교실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정식으로 부검에 참여한다. 조금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것 뿐만 아니라 직접 부검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무언지 모를 설렘을 안겨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시스트를 서게 된 날. 부검스케줄을 전날 미리 확인했기 때문에 하루 전 부터 떨리는 마음이 계속 되었다.법의학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이론적인 것들을 실제에서 잘 잡아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 해부학시간에 배웠던 각종 구조물을 실제로 잘 찾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부검과정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때까지 나의 머리속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과제에 대한 성취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수술용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부검실로 향하는 길에도 이런 마음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검대에 반듯이 누워있는 사체를 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참관석에서 보는 것과 부검대 옆이 이렇게 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이던 사체에서 전해오는 그 싸늘함에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딱딱한 관절과 싸늘한 피부와 표정 없는 얼굴에서.
그래, 이 분은 숨을 쉬지 않지.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는 남의 큰 행복 앞에서 나의 행복이 불행으로 돌변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앞에서 초라함을 느끼며, 나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고 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죽음과 삶이라는 것도 다를 바 없다. 늘 누리고 있는 것,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은 그것의 부재 앞에서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생과 사를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어느쪽이든 어느 하나의 소중함을 알게 되겠지만 난 이미 생에 너무도 깊숙히 적응되어 버린 걸. 지금 여기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들이쉬는 이 숨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체를 앞에 두고 만감이 교차하는 동안에 어느새 교수님께서는 외형을 모두 살피시고 절개를 넣기 시작하셨다.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아래로 숨어있던 지방층과 근육, 갈비뼈가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수술실에서 보던 장면과 비교가 되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를 가르는 수술실솨 이미 죽은 사람의 배를 여는 부검실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촉각은 층층을 이루는 피부조직과 그 아래의 근육, 또 그 아래의 여러 장기들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의 의학교육의 결과일까. 요즘 의사들의 문제가 환자를 치료하지 않고 병만 고치려한다는 점이라는 이야기를 누누히 들어왔고,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어느새 한 인간을 보기 전에 하나의 장기와 조직과 세포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가 되겠다던 그때의 깨끗하던 마음 여기저기에 벌써 탁한 거을음이 묻어가고 있는 것일까.
글쎄,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죽어벼러서 서서히 썩어가는 육심을 보며 살아있는 우리 몸의 신비로움에 빠져든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저 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그를 보며 뛰는 심장을 그려보고, 음식을 소화시키는 장을 상상하고, 머리속 작은 공간에서 컴퓨터 보다도 복잡한 회로를 이루며 온 몸을 제어하는 뇌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고 떠드는 그 모든 순간과 영속된 시간에서 그는 한 인간이지 하나의 세포나 장기가 될 수 없다.
죽은 후, 미소짓던 입가는 딱딱해지고, 반갑게 흔들던 손은 굳어지고, 따스히 안아주던 품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중에 그제서야 한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하던 우리 몸의 위대함과 그 뒤에 숨어있는 신비람을 느끼게 된다.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적인 갈림에 대한 고민은 필요없다. 영혼이 육체를 제어하는지, 육체가 영혼을 다스리는지, 죽음은 육체에 국한되는지, 죽음 뒤에 영혼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도 필요없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심장은 뛰고 있고, 나의 생각은 온전하며, 내게는 따스한 피와 그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부검대 위의 사체처럼 나의 심장이 더이상 뛰지않는 때가 온다면 지금의 내가 가진 꿈, 고민, 논쟁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을 때 늘 보던 내 얼굴이 반갑게 느껴진다. 괜히 씽긋 웃어보이기도 한다. 죽음 뒤에는 다시 찾을 수 없을 환한 웃음.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따뜻한 말을 아낌없이 전해줄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우선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으련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