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련한 인턴이었다
부제: 내일 인수인계 할 신규 인턴에게
2011년 2월 말. 잔뜩 긴장된 자세로 병원에 들어섰다. 셔츠에 타이를 메고 곧게 다려진 가운을 입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저녁에 되면 옷은 꼬깃꼬깃 볼품 없고, 소매는 까무잡잡해졌지만 다음날 또 깨끗하게 다려진 옷으로 새벽을 열었다.
2012년 2월 중순. 사흘을 입어 구깃구깃한 수술복과 맨발에 샌들. 세수는 했는데 면도는 안했다. 1년 사이에 참 많이 변했다.
하지만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있다면 간이 커지지 않은 것.
인턴생활을 하면서 피로가 쌓이다 보면 환자 보다도 나를 앞세우게 된다. 꼭 필요한, 긴급한 일들이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지만 인턴 생각에 사소한 것들은 잠시 미루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고 무시해버리는 일도 차차 비일비재해진다. 그동안 환자와 보호자는 발을 구르고 있지만.
신규 인턴 때는 콜을 무시하거나 미룬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식당에서 밥을 뜨다가, 샤워장에서 머리를 감다가,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다가 콜이 오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이 무엇이든 딱 멈추고 달려갔다. 나 뿐 아니라 모두 그랬을거다. (어쩜 나의 착각?)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일이 손에 익고 병원 돌아가는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차츰 요령도 생기고 농땡이도 부리게 된다.
근데 난 1년이 지나도록 그게 잘 안된다. 천성이 착한 것도 아니고, 성실해서도 아니고.. 내 생각엔 내 간이 작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난 콜이 오면 투덜대면서도 일단 가서 한다. 환자가 불편할거 생각하니까 내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마음이 무거워서 잠이 안오는걸 어쩌겠어.
자, 가족이 환자라고 생각해봐. 상투적이지? 그 상투적인 일이니 네게도 생길 수 있는거 아니겠어. 가족이 아파서 침상에 누워있어. 욕창이 생기고, 소변을 못본다고 생각해봐. 근데 인턴은 귀찮다고 오지도 않아. 하루 세번씩 드레싱 해야 할 걸 한번 밖에 안해. 아랫배가 터질 듯 빵빵하고 아픈데 소변을 안 빼줘. 인턴 머리끄댕이 잡아당기고 싶지 않겠어? 그래도 그 분들…. 인턴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고맙다고 수고하신다고 인사해주시는 분들이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어서 그런지 환자들에게 함부로 못한다. 간호사가 여기저기서 부르면 볼멘 소리도 해보고 짜증도 내보지만 어느새 발길이 그 쪽을 향하고 있다. 매정하게 딱 끊지를 못한다.
‘선생님 착해요.’ 아니다. 난 착한게 아니라 간이 작아서… 혹시 환자가 그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 안좋아질까봐. 그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 환자-의사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봐.
지나고 보니 내가 참 미련하게 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들 이렇게 일한 것 같지는 않더라구. 전공의가 시키는 일은 빠릿빠릿하게 하고 간호사가 부탁하면 대충 얼버무리고 환자 구슬려서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고. 이딴식으로 하는 인턴이 제법 되더라구. 그러면서 온갖 불평불만은 다 늘어놔. 자기만 힘든 것처럼.
지난 1년. 적어도 난 환자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전공의한테 잘보여서 점수 잘 받으려는 생각은 단 한번도 안했어. 난 미련해서 거기까지 생각할 영악함이 없었지 뭐. 새벽에 ‘인턴 선생님, 드레싱..’ 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 다시 자는 그런 인턴이 날 보면 얼마나 바보같았을까.
근데 그런 생각해봤어? 나중에 인턴이 내 환자에게 예전에 내가 했듯이 무성의하게 대하면 어떻게 할래? 전공의랍시고 인턴 혼낼거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 콜 왔다.
새벽에 당직하면서 횡설수설 하다보니 정리가 잘 안되지만 난 미련했던 지난 1년이 자랑스럽다.
환자 피 달아주러 간다.


1년이 지난 뒤 선생님과 같은 글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을 응원하며, 저 또한 응원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와. 멋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