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 먼저

05 August 2008 4 Comments Category: 생각의 소리


무슨 대화를 하다 나온 얘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작년에 모 교수님과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충격이 뭐 같나?”
“충격이요? 충격적인 일이라면…”
“그건 상실감이야. 특히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 그러면 부모를 잃는 것과 배우자를 잃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 상실이여?”
“글쎄요. 아무래도 부모님의 죽음이 아닐까요. 살아계실때 못다해드린 후회도 있을거고.”
“아니야. 그보다 남편, 부인 잃는게 더 커. 부모님 돌아가시는거야 당장은 슬프겠지만 내가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거든. 당장 부인 없어봐. 애들은 어떻하며 당장 밥은 어떻게 해먹겠어? 생활이 안되는거야, 이건.”

결혼을 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리고 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만 앞서는 입장에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럴수도 있겠다 하며 넘겼다, 그때는. 시간이 지나 몇차례 다시 생각해보면서 어쩌면 부모란 그런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리사랑이라고 내가 가진 한방울까지 쥐어 짜서 자식에게 아낌없이 털어주는 것이 부모의 숙명이구나, 내가 그 사랑을 받고 있고, 내가 받은 그 사랑은 훗날 내 자식에게 물려주게 되겠지.

항상 좋은 것이 있으면 자식 생각에 고이 간직해 두셨다가 나는 필요없다며 슬쩍 내밀어 놓으시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 자식 생각 먼저 하시고, 당신 입맛에는 맞지 않다 하시는 우리 부모님.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god의 노랫말에 코끝이 찡해지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며칠 전 부모님께 컴퓨터를 하나 보내드렸다. 부모님이 그동안 쓰시던 펜티엄3 컴퓨터는 벌써 몇년이나 된건지 기억도 안난다. 켜고 끄는거 기다리는데만 몇분은 족히 걸리는 구닥다리 컴퓨터. 도저히 안되겠던지 좀 빠른 컴퓨터 얼마나 하면 사냐며 물으시는데 내가 불쑥 뱉은 말은 ‘뭐 그냥 집에서 쓰는건데 모니터까지 다 해도 30만원대로 충분할걸요’ 였다. 뭐 그 정도 가격으로도 지금 컴퓨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긴 하겠지만 왜 무조건 싼 것부터 생각했을까.

결국 부모님께 보내드린 컴퓨터는 2002년 쯤에 조립해서 내가 써오다 고장났던 펜4 컴퓨터이다. 간헐적으로 말썽을 부리더니 결국 작동을 멈춘 뒤 방치되어 있었는데 같은 학과 형에게 업그레이드 하고 남은 메인보드를 하나 얻어서 교체를 했더니 다시 쌩쌩 잘 돌아가길래.

당분간 컴퓨터 둘 다 쓰시겠다기에 공유기도 하나 샀다. 여기서 난 또 ‘무선 말고 유선 공유기 제일 싼걸로 주세요’라고 하고 말았다. 가격 차이가 없는 것을 알고 무선공유기로 구입을 하긴 했는데 무선랜카드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아니 굳이 그걸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문지방을 넘는 랜선을 보시며 선 없이는 할 수 없냐는 부모님 말씀에 ‘왜 부모님 것은 제일 싼거, 꼭 편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 부터 생각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제서야 무선랜카드도 주문하고, 아직 한번도 보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지 모르지만 DVD 수퍼드라이브도 하나 주문했다. 뚱뚱이 모니터 대신에 멋진 LCD 모니터를 해드리고 싶지만 그건 조금더 기다렸다가 본체와 함께 몽땅 바꿀때 해드리기로 결심하면서.

자식에게는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 제일 맛있는 것부터 내놓으시는 부모님인데, 자식인 나는 왜 가장 못한 것 가장 싼 것을 당신들께 드리려 했을까. 왜 ‘나는 자장면 싫어한다’는 말을 바보처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며 살았을까.

받은 사랑, 자식이 아니라 부모님께 고스란히 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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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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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효…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
    그게 마음처럼 말처럼 쉽지 않음을 또 한번 되새기게 되네요.

    라디오키즈 23 August 2008 at 11:10 pm Permalink
    •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조금은 돌려드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갚는 의미가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음 좋겠습니다.

      luv4™ 20 September 2008 at 10:13 am Permalink
  2. 저도 비슷한 경험 한 적 있어요. (ㅠㅠ) 불효자는 웁니다.

    자유 29 August 2008 at 11:02 pm Permalink
    • 전에 자유님 블로그에서 본 사진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한구절 한구절 가슴을 찌르더군요.

      luv4™ 20 September 2008 at 10:13 am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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